꼬마신랑
(150221 #동방신기_전력_60분)
정 가의 꼬마 도련님, 윤호의 장가가 결정되었다. 상대는 심 가에서 그토록 귀애한다는 막내 아들. 도련님이 장가가는데 상대가 딸이 아니라 아들이라니? 라는 의문을 갖는 사람도 당연히 있을 터이지만 심 가의 막내 아들은 월인이었다.
정 가는 이름 높은 무관 집안이었다. 지금은 은퇴하여 가주자리를 내놓은, 윤호의 조부는 화경에 달한 고수로 그 검 하나로 전장을 제패해 정이품 장군 자리를 얻었다. 국경을 침탈하는 아랄 족을 격퇴했을 때는, 무려 황제로부터 '내 장군이 없었으면 어찌 이 나라를 다스리랴!'라는 치하와 함께 황실 비고에서 원하는 것을 아무거나 하나 내려주겠다는 은혜로운 제안까지 들었다. 이전에는 보통의 무가였던 정 가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도 그런 조부의 역할이 컸다. 명장이었던 조부에 비해, 윤호의 부친은 그저 보통 사람이었다. 허나 집안을 관리하는 일이라면 매번 전장으로만 돌던 조부보다 훨씬 재주가 있어, 정 가의 융성은 오히려 조부 때보다는 아비 대에서 이뤄졌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조부와 아비의 좋은 점만 닮아, 문무 양쪽에 출중하다는 평을 듣는 것이 윤호였다. 어찌 보면 당연할 수밖에 없던 것이, 당금 황제의 관대한 제안 - 비고에서 원하는 것은 뭐든 하나 주겠다는 - 에 고민하던 조부는 자신이 쓸 검도, 아들이 좋아하는 비서도 아닌 당시 막 태어난 손자에게 도움이 될 만한 보물을 골랐다. 무려 천 년을 묵었다는 인형설삼은 막 태어나 세상의 어떤 탁기도 아직 쌓이지 않은 아이에게 복용시 모든 혈을 타통하여 그 체질을 바꾸고 어마어마한 공력을 쌓도록 도와주는 효과가 있었다. 자신이나 아들보다, 앞으로 가문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 손자를 강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했던 조부의 판단은 맞아떨어져, 윤호는 어려서부터 온갖 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했다. 검이면 검, 활이면 활, 창이면 창, 모든 병기를 제 손처럼 다뤘으며 한 번 읽은 책은 다시 읽지 않아도 머릿속에 남아 1년 전 읽은 책의 어느 장을 외워보라 해도 망설임 없이 답을 내놓았다.
정 가의 자랑이었던 윤호가 근심이 된 것은 윤호가 다섯살 때였다. 설삼의 효과인지 한겨울에도 감기 따위를 모르던 윤호가 어느날 갑자기 고열을 내며 쓰러진 탓이었다. 집안이 발칵 뒤집혔고, 부랴부랴 데려온 장안 제일의 명의는 윤호가 지나치게 양기를 품고 있다는 진단을 내놓았다.
"이 아이는 나기부터 태양지체. 몸에 양기가 성한 존재요. 기운을 흡수하면 몇 배의 양기로 돌려 제 몸을 강건케 하니, 이지가 청명하고 근골이 빼어나 인재중의 인재로 성장할 것이었으나 이게 득인지 실인지 그 몸에 영약이 더해졌소이다. 강해지기는 더 할 나위가 없이 강해졌으나, 가뜩이나 강했던 양기가 더 강해져 기운의 균형이 흐트러졌소."
무슨 방법이 없냐는 정 가 식구들의 독촉에 의원은 난색을 표하며 주저주저 답을 내놓았다. 원래 양기를 증폭시키는 몸에 강한 양기 덩어리인 영약이 들어갔으니 어지간한 음기로는 균형을 맞추기 어려우나, 딱 하나의 방법이 있으니 그것이 '월인'이라는 것이었다.
태양지체도 흔치 않은 천골지체이나, 월인은 그야말로 천 년에 한 번 나타난다는 희귀한 존재였다. 양기를 지나치게 머금은 태양지체와 달리, 음기를 지나치게 머금은 음한지체는 그 몸이 지나치게 약해 태어나자마자 보통 사망에 이른다. 허나 월인은 몸에 음기의 비율이 지나치게 높음에도, 달이 차고 이지러짐에 따라 제 몸의 음기를 자연스럽게 조절해 음한지체여도 생존이 가능했다. 보통 사람보다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난 태양지체의 아이를 갖고 있는 집안은 그래서 늘 월인을 찾고는 했다. 강한 음기로 태양지체를 보조하여, 보다 안정적으로 그 힘을 쓰게끔 하는 최상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허나 윤호의 경우는, 단순히 힘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 월인의 존재가 시급했다.
다행인 게 있다면, 그 천 년에 한 번 태어난다는 월인이 현 세대에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소녀가 아닌 소년이었지만 귀한 손자의 생명이 걸린 정 가에서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다른 태양지체를 가진 집에서도 호시탐탐 노리고 있기에, 혹시라도 선수를 빼앗길까 싶어 조부가 직접 나서 황제에게까지 선을 댔다. 황제는 제가 좋은 의도로 한 선물에 정 가의 귀한 손자가 목숨을 잃을 위기라는 말을 듣고 책임감을 느꼈는지, 심 가의 가주를 불러 생명을 구하는 일이라 설득까지 해 주었다. 그리 높은 직위는 아니었지만 나라에 대한 충심 하나는 대단했던 심 가의 가주는 황제의 설득에 결국 제 집 귀염둥이인 막내 아들을 정 가의 며느리로 내 주었다. 총명하다 해도 정 가의 윤호는 고작 6살, 그보다 나이가 많다 해도 심 가의 창민은 고작 10살. 정식 혼례는 더 커서 치르기로 하였으나 윤호의 목숨이 영향을 받고 있는 고로 결혼 전까지 창민이는 정 가에 와서 살기로 빠르게 결정이 되었다.
*
- 네 목숨은 앞으로 저 이에게 달렸단다. 네가 싫든 좋든, 보름이면 꼭 저 이와 같은 방에 들어가 운기조식을 하거라. 달처럼 저 이도 제 안에 가득한 음기를 보름에 내보낸단다. 그게 네 몸의 양기를 조절하는데 도움이 될거야.
어머님이 신신당부를 하였지만서도 윤호는 여엉 제 앞에 선 이가 마땅치 않았다. 저는 사내인데, 어이 사내와 결혼이란 말인가. 총명한 머리는 그것이 저에게 득이 되는 것이라 결론을 내 주었지만, 마음은 그것도 차지 않았다. 결혼이라 함은 자고로 사랑하는 사람과 하여야 하는데, 이토록 어린 나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사람과 결혼이라니! 나보다 나이는 넷이나 많고, 키도 저렇게 벌씬하게 큰 이가 무슨 내 신부고 아내란 말이야? 저 신부너울로 가린 얼굴도 분명 우락부락하게 생겼을테지! 흥흥대고 섰던 윤호는 직접 확인해보기로 했다.
"그거, 벗어봐."
윤호야! 앳된 두 소년들의 만남을 흐뭇하게 보고 있던 어른들의 사이에서 장탄식이 들렸지만 윤호는 고집스럽게 너울을 가리키며 벗어보라 다시 채근하였다. 큰 키에 비해 다소 소심한 성격인지, 신부인 창민이는 영 손을 올렸다 내렸다 망설이다가는 결국 너울을 벗지 못하고 손을 내렸다.
"어른들께서, 결혼은 이후라도 오늘은 명색이 첫날밤이니 너울은 남편 될 분께만 뵈이라 하였습니다."
변성기가 오지 않은 목소리는 계집마냥 높고 고왔지만 윤호는 그마저도 마뜩찮았다. 목소리만 고우면 뭐하누? 얼굴이 고와야지. 남편 앞에서 벗으라 하는 어른들 말보다 더 중요한 건 남편인 내가 벗길 바란다는 것인데 말도 어지간히 안 듣는구나. 필시 보이기 자신없는 얼굴이렷다? 삐딱해진 윤호는 "그 남편이 바라는 것이다."하며 틈을 주지 않고 손을 뻗어 너울을 벗겨내렸다. 손이 잘못 나갔는지, 너울을 벗겨낼 때 긴 머리를 동여매고 있던 머리끈까지 끊어낸 것 같았다. 너울이 벗겨짐과 동시에, 숱 많은 긴 흑발의 머리가 스르륵 밑으로 함께 쏟아져내렸다. 덕분에, 윤호는 정말로 앞의 존재가 월인이구나 생각했다. 검은 머리에, 놀라서 더 커진 눈을 한 분내나는 얼굴이 대조되어 밤하늘에 달이 뜬 것 같았다. 소년이되 어딘지 연약해보이는 느낌이 소녀같기도 하였으나 소녀는 아니었다. 어여쁘지 않을텐데 또 어여뻤다. 기묘하게 고운 얼굴을 윤호는 잔뜩 노려보았다. 아예 못났다면 그래 네 팔자도 참 장하구나, 남자로 태어나 남자에게 시집오다니! 하며 한 번 비웃는 것으로 끝냈을 텐데, 앞에 있는 존재는 그리 놀리지도 못하게끔 생겼다. 윤호는 그간 읽은 책들 중에서 저 얼굴에 가장 어울리는 단어를 찾았다. 수백, 수천, 수만가지의 단어 중에 가장 적합한 것은,
예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음을 동하게 한다.
사내인데 마냥 사내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계집같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저런 것을 책에서는 그리 말했다. 요사하다. 요망하다고.
그리 생각한 윤호는 얼굴을 찌푸렸다.
*
첫 인상이 영 좋지 않은 탓이었는지, 한 집에 사는 부부(의 연을 맺을) 사이인데도 두 소년의 사이는 영 냉하기 짝이 없었다. 윤호는 보름이 되기 전엔 창민이의 방을 들어와 보지도 않았고, 보름이 되어도 해 질 무렵 느릿느릿 들어와 문가에 자리를 잡았다. 밀폐된 공간이라는 조건만 만족하면 되는지라, 방문을 닫고 창민과는 아주 거리를 둔 채 문가에서 운기를 했다. 창민도 처음에는 어른들께 사이 좋게 지내라 말을 들었는지 윤호에게 제법 살갑게 말도 걸어오고 했었지만, 저보다 네 살이나 어린 윤호가 번번히 무시하거나 매서운 말을 내뱉는 것에는 견딜수가 없었는지 나중엔 말도 걸지 않고 묵묵히 윤호가 들어오건 말건 제 자리에서 제 할 일을 했다.
어른들은 나중에 크면 사이가 좋아지겠거니, 라고 생각했지만 잘못된 생각이었다. 충분한 음기까지 흡수해가며 더욱 더 강건하고 그 능력이 우수해진 윤호는 날이 갈수록 빛을 발했고, 어린 나이에도 관직에 등용되어 중히 쓰였다. 첩이라도 좋다고 목매다는 여자들도 부지기수. 바쁘다 하여 집에는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집에 들어와도 창민의 방에 들어가는 것은 보름 하루요, 그 날도 창민 근처에는 오질 않았으니 말만 부부가 될 사이지 남보다도 더 먼 사이였다. 얼굴을 본 지도 가물가물했다. 남자로 태어났으되 사내에게 시집가기로 약조되어 방 안에 붙들린 창민은 그런 제 신세가 지긋지긋했다. 망할 팔자. 누구는 월인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는가. 사내와 결혼하고 싶었는줄 아나. 4살이나 어린 꼬맹이는 저만 싫은 줄 알고 퉁퉁대는데, 나도 싫다! 누구는 꽃같은 여인을 신부로 맞지 않고 싶었는줄 아나! 황제가 아비를 설득만 한 게 아니라 관직을 가지고 협박까지 했고, 막내인 저를 끔찍히 귀애하던 제 아비가 차마 그 얘길 제게 꺼내지도 못하고 냉가슴을 앓는 걸 우연히 알지 않았다면 이따위 신부자리, 누가 허락했을 줄 알고.
아니, 막말로 억울한건 자신 아닌가. 남자랑 결혼 안해서 죽는 건 내가 아니라 그 못된 신랑 쪽이다. 근데 그 녀석은 아주 제 하고 싶은대로 다 하고 살고, 나는 이리 방 안에 갇혀서 하루하루 말라가고! 집안 어른들도 귀한 아이라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게는 해 준다만 집 안에서 할 건 그리 많지도 않다. 책 읽고, 가야금 타고, 정원 구경하고. 그러고 나면 끝. 검은 '신부' 될 사람이라고 못 배우게 하니 책과 음악을 벗으로 삼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것만 하는 것도 질렸다. 오죽했으면 계집이나 할 자수를 다 배웠겠나. 제법 손재주가 있는지 처음보다 어여쁜 것들을 만들 수 있게 되었지만, 누구 보여줄 이도 없다. 집안 어른들은 귀한 사람이라 정중히 대하라고는 하지만 딱 그 뿐이다. 남자인데 며느리라는 위치 때문인지 하인들도 하녀들도 누구하나 편하게 대해주질 않아서 집에 친한 사람이 없으니 뭘 터놓고 얘기할수도, 내 만든 것 보고 품평해달라 조를 일도 없다. 몇 년이고 그러려니, 하고 꾹꾹 눌러참아온 것이, 오늘따라 설움이 북받치는 것은 아마 정승 집 따님이 첩자리라도 좋으니 윤호와 연을 맺고 싶다고 졸졸 쫓아다닌다는 소문을 하녀들이 떠들고 있는 걸 우연히 듣게 되어설 거다. 그래, 그래 너는 좋겠다아. 누구는 팔자에 없이 계집마냥 방에 갇혀있는데 누구는 귀한 집 아씨들이 졸졸 쫓아다니고!
쌓였던 게 폭발한 탓에, 창민이는 평소에 생각지도 못했던 모험을 하기로 하였다. 정말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자수를 익힌 이후로 몰래 몰래 만들어 오던 어머니 나라 전통의 옷. 동이의 옷이라 하는 그 옷은 선이 부드럽고 풍성하여 이 나라의 것과 형태는 다르지만 곱기도 고왔다. 무엇보다, 타국의 전통 옷이니만큼 정체를 숨길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지. 보따리에 꽁꽁 싸맨 그 '한복'을 창민이는 담장 너머로 던지고, 발받침대를 밟고 올라서는, 그래. 훌쩍 그 담을 넘어버렸다. 월담이라는 일생 일대의 모험이었다.
*
간만에 나온 거리는 북적북적이는 것이, 간만에 느껴보는 사람의 활기였다. 늘 대화도 없이, 만나는 인적도 없이 살다가 사람들과 섞이는 것만으로도 흐뭇하고 즐거워 절로 창민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타국의 옷을 입은데다, 어릴때보다 한층 곱고 준수해진 얼굴이 저절로 주위의 눈길을 끌었다. 세상을 모르고 살아 나이에 비해 순진하고 모든 것이 신기한 청년이, 길거리에서 그리 태를 내고 있으면 사고를 당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갑작스레 주변에서 소란이 일었다. 어이구구! 죽는 소리를 내는 남자의 목소리에 놀라 돌아보는데, 어딘지 낯설면서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을 어디 놓고 다니는 게냐? 이 사람이 방금 네 전낭을 훔쳤다."
고맙습니다, 라고 말하려던 창민은 지금 자신이 몰래 월담한 상태라는 것을 인지하고 머리를 굴렸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 타국 복장까지 입었는데, 사소한 것이라도 티를 내고 가면 안 되겠지? 어머니가 제국이 아닌 동이에서 온 이였기에, 어려서부터 동이어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는 상태였다. 복잡한 회화는 못하지만, 어차피 지금 필요한 것은 복잡한 회화도 아니었다.
[고맙습니다.]
부러 동이어로 그리 말하며 본 상대의 얼굴은. 목소리를 듣고 생각했던 것처럼 어딘가 그리운듯 낯설어서,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 했다. 깎아놓은 관옥처럼 잘생기고 아름다운 얼굴인데, 보고 감탄하면 그만인 얼굴에 왜 마음 한 구석이 덜컹거렸는지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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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신랑신부들이 어렸을 때 앵돌아져 있다가 어른되서 지들이 짝인줄도 모르고 연애하는거 좋아함....
원래 궁중물로 상플했던 게 있었는데 전에 황태자 설정 한 번 써먹었어서 이번에는 그냥 살짝 무협설정 쉐킷하는 걸로. 박대받는 후궁 설정 못 쓰는 건 좀 아쉽지만 월인설정을 넣어봄.
야경꾼일지에서 무석이가 여주 구해주는 대신 창민이 구해줬음 좋겠다! 라는 사심을 담아 써봄.
무석이는 사랑..........
월인 창민이의 이미지는 이런? 성장하면 아마도 명지밍이 될ㅇㅇ 한복은 아니지만 이런 느낌으로 생각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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