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에는 두 송이의 꽃이 핀다네
하나는 양귀비고 하나는 빙설화라
그대 어여쁘기 그지 없다 손을 대지 마소
제국의 꽃
(150207 #동방신기_전력_60분)
제국에는 두 송이의 꽃이 있었다. 보통 꽃이라 하면 분내나는 고운 계집들을 칭할 때 쓰는 표현이나, 제국의 꽃들은 계집이 아닌 사내들이었다. 그것도 그냥 사내가 아닌 지독히 잘난 사내들이었다. 황태자인 창민은 물론이요 그 호위기사인 윤호도 제국 제1기사단의 단장으로서 그 무위가 대륙을 진동시키고 있었으니 꽃이라는 단어가 주는 그 화사하거나 연약한 이미지와는 어찌 보면 꽤 위화감이 드는 별칭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별명이 꽤나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오히려 그 위화감 때문이었다. 황태자는 냉철했고 그 손속이 잔인하였다. 황태자의 성정이 그러하였으니 그 황태자의 제일검으로 쓰이는 윤호의 손속은 말할 것도 없었다. 두 사람은 전장을 제집처럼 누비며 그 위명을 떨쳤고 최전방에서 적들을 상대하였다. 전장에서 도발은 매우 흔한 일이었고 둘을 꽃으로 표현하는 말 또한 그 때 처음 쓰였다. 사내치고 어여쁜 미모를 가지고 적들은 둘을 희롱하였다. 황태자 자리를 어찌 얻었나 했더니 황제 침소라도 파고들었느냐? 아비와 접붙어가며 다음 대 제위는 제게 달라고 속삭였다는 소문이 파다하더구나. 거 참 나라 망칠 요물이로세. 주군이 그런데 종은 오죽하겠느냐. 둘 다 뒷구멍은 잘 씻어두어라. 이 어른이 잘 파주마. 천박한 농지거리를 던지며 도발하는 적들을 보며 창민은 무표정하게 제일검 윤호에 그들의 전멸을 지시했고 윤호는 그대로 따랐다. 황제가 작전을 짜고 윤호가 군대를 이끌면 그 지나간 곳곳에 적들은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다.
둘을 모욕하고자 꽃이라는 별명을 처음 붙인 게 적이라면, 그 별명을 널리 퍼뜨린 건 백성들이었다. 전장에서 쌓은 둘의 공은 대단하였고, 누군가는 그를 감탄하며 존경하되, 다수의 사람들은 불안감을 느꼈다. 적을 물리칠 때는 강건한 그 성정이 득이 될지 모르나, 황제에 오르고도 저토록 잔인하다면 어찌하겠는가 - 라는 사람들은 다소의 적의를 담아 황태자를 "꽃은 꽃이되, 독이 있는 꽃이로다."라며 비난하였다. 그에 비하면 호위기사에 대한 소문은 다소 얌전했다. 감정없이 지시를 수행한다 하여 얼음꽃, 빙설화라 불렸는데, 이는 황태자에게 붙여진 양귀비에 비하면 귀여운 축에 속하는 별명이었다.원래 공로도 비난도, 책임자 쪽이 뒤집어 쓰는 법이다. 황태자에 대한 소문은 전쟁터에서 적들이 조롱하기 위해 사용했던 그것과 뒤섞이고, 각색되었다. 그렇게 붙은 별명이 양귀비였다. 그 별명은 사람을 중독시켜 폐인으로 만드는 열매의 독성을 연상케도 했고, 과거 나라를 기울게 했다는 미인을 연상케도 했다.
처음에는 독화라 하여 불리던 양귀비란 별칭은, 이상하게도 점차 후자의 의미로 퍼져갔다. 황태자가 아비의 침소를 파고들었다는 것은 아무 근거가 없었다. 그저 전쟁터에서, 상대를 도발하고자 주워 섬기는 말 중 하나에 불과했다. 원래 전쟁터에서 도발이 흔했던 만큼, 그러한 더러운 말들은 참 많이도 오갔다. 네 에미가 개와 접붙어서 낳은게 네라면서? 라는 패륜적인 말부터, 그 장군 자리는 몸으로 따냈다는 말이 파다하니 이리 와서 구멍이나 벌려보라는 천박한 성적 농담까지. 그저 전투 한 번이 끝나면 시체와 함께 전장을 굴러다닐 의미없는 말들이었다. 그 중에서 이상하게도 황태자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만이, 양귀비라는 별명과 함께 살아남아 백성들에게까지 널리 퍼졌다.
황태자는 악인이 아니었다. 성정이 선한 성군이라 불리기엔 모자람이 있었어도, 제국의 국경을 침범해 오는 오랑캐들을 물리치며 백성들의 잠자리를 편케 하는데 공헌하고 있다는 데서는 명군의 자질을 보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직 황태자는 백성들을 해친 적도, 과한 세금을 물린 적도 없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황태자를 무서워했다. 천륜을 어기고 아비의 침소에 들은 미동, 고운 얼굴로 남자들을 호려 전장에 내세우고 잔인하게 적을 살해하는 살인마, 황제가 되면 백성들을 핍박하고 무거운 세금에 신음하게 할, 나라를 망하게 할 탕녀요 폭군. 황태자는 그 모든 소문에 신경쓰지 않았다. 전장에서 상대가 저열한 말로 도발해올 때도, 평정 하나 잃지 않고 그를 베고 오라 지시하던 냉철한 이가 그였다. 근거도 없는 말에 흥분하는 대신 이성적으로 참고 넘어가는 데는 이골이 나 있었다.
그래서, 너무 늦게 안 것이다. 황태자는. 그 소문을 수습했어야 한다는 것을.
*
"황태자 민은 그 성정이 잔학하여 나라를 다스리기에 심히 부족함이 많으니, 이에 위를 폐하여 폐서인으로 삼는다."
"이로 황태자 위가 비어 나라가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막고저, 대장군 정윤호를 나라의 상국으로 봉해 국정을 맡긴다."
아비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리 옥새가 찍힌 문서를 읽어내렸다. 아비는 몸이 약해 일찌감치 저를 황태자로 낙점하여 군사를 맡기고, 국정은 노대신들에게 맡겨 나라를 운영하였다. 저가 성인이 되면 아비는 제위를 양위하고, 국정 또한 차츰차츰 제게 넘어올 예정이었다. 어디까지나 별일이 없었다면 그랬을 것이었다. 설마, 제가 쥐고 있던 군사권이 한 남자에 의해 약탈당하고, 그 남자가 노대신들마저 겁박해 국정마저도 농단할 것은 적어도 자신은, 아비는 예상치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 남자가 저와 함께 나란히 꽃으로 불릴만큼 내내 저와 함께 해주던, 누구보다도 든든한 저의 제일검이라는 것이 가장 큰 배신이었다.
곱게 비단끈으로 묶어올렸던 머리가 제멋대로 헤쳐져, 늘 당당하게 펴고 다니던 등은 병사들에게 짓눌린 채로 바닥에 강제로 무릎꿇려졌지만 황태자였던 그 기세는 어디 가지 않아, 창민은 형형한 눈을 들어 배신자를 노려보았다. 네 어찌 감히 내게 이럴 수 있느냐. 이토록이나 상황을 변화시켜 놓은 주제에, 변하지 않은 것은 윤호 또한 마찬가지였다. 전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속 모를 차가운 눈동자로 윤호는 창민을 보았다. 충성, 을 뱉고는 말을 달려 제 명령대로 적을 베러 갈 때와 같은 눈동자였다. 그런 눈동자를 하고, 네 어찌 나를 내려다 보아. 네 어찌 나를 죄인으로 끌어내려. 네가, 감히, 어찌!
".....죄인의 신변은 이쪽에서 돌보겠소."
십년은 늙어보이는 아비는 그 말을 거역하지 못했다. 새로운 실권자가 등을 돌려 걸어갔고, 창민은 그 등을 붙잡으려 했다. 대체 왜, 어째서. 무엇부터 물어야 하는지는 자신도 몰랐으나, 창민은 대답을 필요로 했다. 아무것도 납득할 수 없었기에, 대답을 들려줄 수 있는 건 윤호 밖에 없었기에. 그러나, 무언가를 묻기도 전에 뒤에서 등을 누르던 병사들이 사납게 창민을 다시 제압했다. 놓으라 몸부림을 치려 했지만, 뒤에서 고요히 대기하던 내시 하나가 다가와 창민을 붙잡고 있던 병사들에게 지시를 전했다. 죄인이라 하여 허투루 다루지 말고, 예를 갖춰 씻기고 정갈한 옷을 입혀 무영전에 거하게 하라 하셨습니다. 지시를 들은 병사들의 손속이 조금 늦춰졌다. 그렇다고 해서 창민이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었다. 그 지시대로, 끌려가 창민은 궐 서쪽의 무영전에 갇혔다.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병사들이 붙어 삼엄하게 감시하였고, 배치받은 시녀들은 지시대로 씻기고 옷을 갈아입혀 창민을 돌보았다. 언뜻 그 태도는 정중하였으나, 창민은 그 태도 안에 멸시가 섞여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답을, 창민은 그날 밤 전각을 찾아온 윤호에게서 들었다.
*
"그대가 폐위당한 이유라."
윤호는 즐거운 웃음을 띄었다. 남들은 표정 변화가 없다고 느끼겠지만, 아주 어릴적부터 윤호와 함께 해 온 창민은 그것이 웃음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요구했으니까."
어째서냐, 묻는 창민에게 윤호는 주의를 주었다. 그대는 더 이상 황태자가 아니고, 내 상관도 아니야. 그저 죄인이지. 나는 이 나라의 상국이고. 그대는 더 이상 나에게 그리 대하면 안돼. 그러나 창민은 꿋꿋히 다시 물었다. 어째서냐. 윤호는 이번엔 주의를 주는 대신 아까보다 한층 비릿한 웃음을 띄웠다.
"그대가, 이런 사람이니까."
윤호는 한 발짝 발을 옮겨 창민에게 더 가까이 다가섰다. 입술 위를 손으로 덧그리듯 쓰다듬으며 윤호는 말했다. "그대가, 그런 사람이라, 그렇게 해야 가질 수 있었으니까."
누군가에겐 양귀비였던 그이가, 윤호에게는 벚꽃같았다. 십여년 전, 이 고고한 태도의 황태자가 아직은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볼이 바알간 소년이었을 시절 윤호는 그이를 처음 만났다. 아비는 태자에게 이 아이가 힘이 되어줄 거라며 소개했고, 태자는 윤호를 보며 까르르 웃었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이야? 정씨 집안의 윤호로구나! 나는 그대를 윤이라 부를테야. 그대는 검을 잘 써? 나도 검을 배우고 있다. 나는 장래에 이 나라를 괴롭히는 오랑캐들을 다 쫓을테야. 그대, 나와 함께 해 주겠어? 내가 만들고픈 나라를 같이 만들어주겠어?
사뿐히 나리는 분홍 꽃잎들 아래에서 빙글빙글 돌며, 제가 만들고 싶은 나라를 이야기하는 황태자는 지독히 눈이 부셨다. 어쩐지 목이 말라 침을 삼켰다. 그게, 드디어 모시고 싶었던 주군을 만난 기쁨인 줄 알았다. 이런 주군과 함께한다면, 그래서 그 뜻에 동참한다면, 저 역시 원하던 일을 할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라겠냐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그 욕망이 더 커지고, 커져서. 주군 이상으로 바라고, 욕망하고, 가지고 싶어지고. 처음 만났을 때 느낀 갈증은 한 번도 사그라든 적이 없었다. 황태자의 곁에 서면 항상 목이 말랐다. 허기졌다. 그 허기를, 갈증을 달랠 방법이 바로 옆에 있는데 가질 수 없고 갈구만 해야 하는 것은 천형이었다. 무엇을 잘못하여 나는 이토록이나 지독한 벌을 받아야만 하는가. 원망하던 끝에, 생각하고 말았다. 바라만 보되 닿을 수 없던 존재를 제 것으로 하는 방법을.
그래, 황태자가 아니어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황태자가 아니어야만 가질 수 있다면, 황태자가 아니게 만들어버리자고 생각했다. 나 같은 놈이 감히 손댈 수 없는 지고한 주군에서, 바닥으로 떨궈서 천한 신분으로 만들어버리면 제 품에 가둬넣고 농탕질을 쳐도 될것만 같아서. 그리하여 부러 그이에 대해 천한 소문을 냈다. 그저 지나가는 말이 되어버릴 험담을 집요하게도 부풀려 민심을 뒤엎고, 그이와 아랫사람들을 이간질하고. 그이가 저를 믿고, 믿음을 키워가는 십여년간 저는 그이를 배신할 준비를 마쳐왔다.
그래, 그렇게 할만큼. 내가, 그대를 .....해서.
"배신자."
경멸과 분노로 물든 그대에겐 절대 닿지 않을 말이겠지만. 전할 수도 없는 말이겠지만. 그래도 그대를 내 품에 안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기에 나는 그리하였어. 남들이 그리 말했지. 그대가 양귀비라면 나는 빙설화라고. 그 말이 맞아. 피가 흐르는 인간이면 그리하지 못할 배신을 태연하게 해 버렸어. 권력에 눈이 멀어 이 찬탈에 한 몫을 보탠 주제에, 저는 다른 사람인마냥 노대신이 나를 비난하더군. 내 피는 분명 차가울 거라고 말이야. 나는 부정하지 않았어.
그러나 그대는 이해해줘야 해. 빙설화는 가여운 꽃이야. 꽃이라 보기에는 불쌍할 정도로 자그마한 꽃망울 하나를 피우고, 씨앗조차 만들지 못해 뿌리로 번식하지. 왜 그렇게 하면서까지 추운 겨울에 잎을 내고 꽃을 피우는 걸까. 그만큼 집요하여서 그래. 나 역시 그러했어. 역사서에는 내가 찬탈자가 되고 권력에 눈이 멀어 제 주군을 해친 변절자로 기록되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 그대가 나를 집요하게 만들었어.
이 역시 전할 수 없겠지만.
윤호는 앞에 있는 사람을 끌어안았다. 이렇게 살을 맞대고 있는데도, 상대의 피부는 따뜻한데도, 상대에게서는 차가움만이 전해진다. 그래도 괜찮았다. 추워도 그 접촉이 저를 살게했다. 소년시절 이후로 한 번도 가신 적이 없던 갈증이, 창민이를 끌어안고 들숨날숨을 쉬며 호흡할 때마다 서서히 걷혀가고 있었다. 더 허기를, 갈증을 치유하려 윤호는 창민을 끌어안고 입술을 탐했다. 처음엔 바둥이던 창민은 조금씩 무력해졌다. 오기 전 미리 피워놓으라 했던 최음향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 같았다. 달아오른 몸을 어찌할 줄 모르고 뚝뚝 눈물을 떨구는 창민을 안으며 윤호는 저를 정당화했다. 살기 위해서 그랬어. 내가 죽지 않으려 당신을 -----
어떤 말을 해도 변명밖에는 되지 않을 걸 앎에도,
내가, 그대를, ..........해.
무영전 침전 위에서 꽃이 꺾이던 그 밤,
어느 봄날 소년들이 만나던 시절처럼 후원에서는 연분홍 벚꽃잎이 총총 휘날리고 있었다.
--------
뜬금없이 왜 시대극이냐고 하면 그냥........
아마도 영향받았을 사진은 저 위의 벚꽃 사진이랑 밑의 톤 팜플렛 사진.
차갑고 서늘한 느낌에 이율배반적 느낌도 드는 푸른장미.
'WITH > 낙서-Open door'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이좋은 형제 (150228 #동방신기_전력_60분) (2) | 2015.02.28 |
---|---|
꼬마신랑 (150221 #동방신기_전력_60분) (6) | 2015.02.21 |
자극하다 (150124 #동방신기_전력_60분) (0) | 2015.01.24 |
재회, 공항 (150107 #동방신기_전력_60분) (0) | 2015.01.17 |
지금 이대로, 우리들 (0) | 2013.1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