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호(백도훈 설정) x 심창민(오스카 설정)
재회, 공항
(150107 #동방신기_전력_60분)
심창민.
쿨한 사랑을 하고 싶었다. 질척한 감정에 휘둘리는 것은 질색이었다. 안녕, 이라는 한 마디로 뒤돌아서 바이바이할 수 있는 것이 좋았다. 요즘 세상에 신파적 사랑이라니, 허우적거리며 끊어내지도 못하는 그런 사랑 따위는 드라마에서 찾으라며 코웃음을 쳤었다. 주변 사람들 모두 그런 나의 지론을 알았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그게 맞다며 엄지를 치켜들어주었고, 사정을 아는 사람은 잠시, 혹은 오래 나를 쳐다보고는 했다. 명백한 동정의 빛을 띠고. 그럴 법 했다. 나란 녀석은 쿨함과는 거리가 아주 먼, 진득거리는 사랑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 이유로 내 인생을 내 멋대로 할 수 없게 됐다, 단 한 순간도.
친가는 제법 잘 사는 축에 든다. 명사 소리도 왕왕 듣는 편이다. 역동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할아버지는 그 시기를 오히려 아주 잘 이용해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단순히 자수성가라고 하기에는 뭐한가. 국내에서도 손가락에 꼽는 기업의 대주주, 재벌로서 자리를 탄탄히 잡고 계시니. 본인이 못 배운 것에 대한 원한도 있어, 자식들도 하나같이 훌륭하게 키워냈다. 의사에, 판사에, 지역구 국회의원에, 기타 등등. 특히 예뻐했던 막내 아들의 작은 일탈 빼고는 정말로 자식농사를 잘 지은 사람이었다, 할아버지는. 그래서 그 일탈에 더 노여워했는지도 모른다.
너는 뭐가 되어야 한다고 꽤 극성맞게 자녀교육을 시킨 할아버지는 유독 막내아들에게는 물렀다. 3시간 자면 합격하고 4시간 자면 불합격이라고 딸들에게도 그리 공부하기를 강요했던 사람이, 막내아들은 시험을 못봐도 혼내지 않았다. 나중에 해외에 가서 유학을 하면 교수 자리 하나는 받을 터이니 뭐가 문제냐고, 오냐오냐하며 키운 막내아들은 그래서 더 착하고 세상물정을 몰랐다. 할아버지의 표현에 따르면 '여우같고 독사같은 음란한 창녀'와 사랑에 빠질 만큼.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떻게 만났는지에 대해서는 증언이 엇갈린다. 할아버지는 창녀가 팔자를 고쳐보겠다고 정체를 숨긴채 아버지를 꼬셨다고 했고, 아버지는 그건 아니라고 부정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적어도 아버지는 어머니를 많이 사랑했을 거다.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아버지의 말을 한 번도 거역한 적이 없던 착한 아들은 창녀의 유혹에 빠져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도망쳤다. 그리고 애도 낳았다. 그게 나다. 세 가족은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럴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버지는 의외로 할아버지를 닮아 상재가 있었는지 그럭저럭 장사로 돈을 벌어왔고, 엄마는 처음으로 해보는 가사일에 서투르지만 열심히 매진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 5년을 살았다. 나는 유치원에 갔고, 유치원에서 춤도 노래도 그림도 배웠다. 6개월에 한 번씩 유치원에서는 아이들이 그동안 익힌 성과를 부모님들에게 보여주는 발표회를 열었다. 첫 발표회 때 엄마는 오지 않았다. 엄마는 집 밖 외출을 매우 꺼렸다. 그게, 엄마의 옛 직업때문인 걸 몰랐던 나는 다음 발표회 때는 꼭 오라고 졸라댔다. 곤란해하던 엄마가 결국 고개를 끄덕인 것이 비극이었다.
그리 크지도 않던 그 마을에서, 그 유치원의 발표회에 모인 학부모 중 한 사람이 예전 엄마의 손님이었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분명한 건, 0%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 일은 일어났고, 그 손님과 엄마 사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던 건지 어렸던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집으로 남자가 몇 차례 찾아왔고, 아빠와 엄마가 싸웠고, 유치원에서 다른 아이들이 엄마아빠가 너랑 놀지 말랬다고 말을 했고. 그러다가 엄마는 떠났다. 내가 이렇게 사는 게 잘못된 거였다는 편지와 엄마의 사인이 되어 있는 이혼서류 한 통만을 남기고. 아빠는 내 손을 잡고 친가로 돌아왔다. 그 년과 헤어질 때까지 꼴도 보기 싫으니 집에 들어오지 말라던 할아버지는 엄마와 헤어진 아빠를 받아들여주었다.
나는 아니었다. 할아버지에게 있어 혈육은 아빠 뿐이었다. 그 혈육이 잘못된 길을 갔었으나 뉘우치고 돌아왔으니, 이젠 좋은 양갓집 규수를 물색해 결혼시켜, 모든 것을 바로잡을 때였다. 거기에 있어 나는 방해이자 불순물에 불과했다. 할아버지는 아빠의 호적을 정리시켰다. 엄마가 남긴 이혼 서류 반대편에 아빠의 사인을 해 접수시키고, 나는 큰아버지의 호적으로 입적되었다. 할아버지는 호적에는 올리나 나를 핏줄로 인정하지는 않는다고, 어디에 가서 함부로 심씨 가문의 성을 팔고 다닐 생각은 엄두도 내지 말라며 엄포를 놓았다. 있는 듯 없는 듯 살라는 게 그네의 명령이었다. 뭐, 나쁠 것은 없었다. 직업을 갖고 이름을 당당히 내보이며 살 수 없는 대신, 평생 임대료만 받아도 먹고 살 건물을 받았으니까.
그저 유유자적, 살았다. 공부를 열심히 해도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정치가, 판사, 의사, 하다못해 공무원까지. 할아버지가 자랑스러워하는 모든 자식의 직업은 '이름을 빛내는 것'이었고, 내게 허락되지 않은 그 유일한 것이 '이름을 빛내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다 만난 것이 '그'였다.
나는 아직도 그 때의 그를 생생히 기억한다. 염색이라고는 해 본 적도 없을 것 같은 칠흑처럼 검은 머리에, 눈동자마저도 새까맸다. 뭐든 빨아들일 것처럼.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부잣집 도련님답게 새하얀 얼굴이 신경쓰여 흘끗거리던 내 시선은 어느새 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를 처음 만난 곳은, 그래. 새하얀 아이스링크 위. 대학끼리 맞붙는 아이스하키 대회. 그와 잘 어울리는 운동이었다. 격하게 달리고 치는 운동이지만, 차갑고 서늘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제가 아는 친구가 아이스하키를 한다며 가서 응원해주자고 억지로 나를 끌고 온 후배에게 뽀뽀라도 해주고 싶을 정도로 나는 들떴었다.
경기를 보는 내내 나는 내 심장이 통제되지 않는 것을 느꼈다. 내 취향은 애교 있고 사근사근한 미녀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취향따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이 사람이었다. 내가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 늘 삶은 한가롭고 무료했다. 그는 아니었다. 격한 경기에 몰두하는 그, 경기를 주도해가는 것을 보면 제법 고집도 있고 통제력도 있는 그, 주변 사람들을 격려하고 혹은 야단하며 흐름을 이끌어가는 그. 나와 달랐다. 반짝반짝 빛이 나서 부러웠다.
"내가 말한 친구가 이 녀석이야. 형. 아까 중계하는 거 들었지? 정윤호 선수. 윤호 너도 인사해, 내가 너 응원한다고 했더니 부러 같이 와 주신 내가 되게 존경하는 선배임. 심창민이라고."
후배의 소개를 들은 그의 눈이 나를 향했다. 먼 곳에서 볼 때도 빨려들어갈 것만 같던 그 흑요석같은 눈이 올곧게 내게 와닿았다. 심장이 또 뛰기 시작했다. 아니, 몸부림치고 있었다. 곧 죽을 것처럼 가슴이 조여들었다. 그의 눈은 휘어졌다. 씩 하는 웃음을 지으며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정윤호입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쉽고 당연한 일이었다.
*
그리고, 헤어지는 것은 그보다 더 쉬웠다.
*
나는 그와 다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나와 그는 지독히 같았다. 한 배에서 나온 쌍둥이처럼. 할아버지만큼 나를 미워하는 호적상의 형, 이 그걸 알려주었다. 어느날 갑자기 자신의 동생이 되어버린, 막내삼촌의 아들을 이 형은 지독히 미워했다. 친구를 사귀면 친구를, 연인을 사귀면 연인을 족족 꼬드겨 자신을 따돌리고 괴롭힐 만큼. 그래서 정윤호에 대해선 비밀로 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또 귀신같이 나를 괴롭힐 방법을 들고 온 것이다. 여지껏 만난 그 어떤 사람보다 사랑한 것이 정윤호여서, 그가 어떤 방법을 들고 와도 흔들리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과거의 그 어떤 경우보다 지독한 것을 들고 와서 어쩔 수 없었다.
"더러운 핏줄은 더러운 핏줄을 알아보는거야?"
그는 더러운 핏줄이 아니야, 라고 나는 발끈했다. 어차피 그가 나를 더러운 핏줄이라고 부르는 건 하루이틀이 아니었기에, 그에 대해선 이미 체념한 상태였다.
"엄마를 누나라고 부르는 게 더러운 핏줄이 아니야?"
그는 내 앞에 서류를 던져놓았다. 팔랑팔랑 흩어지는 서류에 쓰인 글씨를 내 눈이 정신없이 따라갔다. 말문이 막힌 내게 그가 얼굴을 가져다 댔다. 이거, 정윤호는 모르고 있더라고. 내가 알려주면 굉장히 재미있을 거 같지 않아? 저런- 모르고 사는 게 더 좋았을 사실을, 너랑 엮이는 바람에 알고 괴로워하게 되는거야. 아아, 너는 정말 주변 사람들에게 역병같은 존재구나. 그는 그게 굉장히 재밌다는 듯 연극적 톤으로 대사를 읇으며 깔깔거렸다.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부정하기엔 사실이 그랬다. 그는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집요하게 괴롭혀 철저히 제거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은 그래서 아주 사무적이거나, 아주 데면데면한 관계를 유지하는 몇몇 뿐이었다. 나랑 친하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사람들의 인생이 망가지는 것은 안 될 일이었기에, 그의 경고가 몇 번 있고나선 알아서 사람들을 쳐냈다. 정윤호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욕심부리고 싶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욕심은 항상 벌을 받는다.
가장 치명적으로 그가 다치기 전에, 나는 그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그가 질렸다고, 그냥 잠시 논 거였다고. 그는 울었다. 하얗고, 검고, 그래서 차갑다는 인상을 주는 남자는 인상과는 다르게 매정하지 못했다. 매정한 건, 그를 두고 뒤돌아서는 내 쪽이었다.
*
그를 다시 봤다. 정말 우연히도. 출국하는 길이었다. 그의 옆에는 이제 내가 아닌 그녀가 있다. 결혼할 사이라고 한다.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나마 머리 좀 굴릴 줄 아는게 전부인 앤데, 아주 성격이 독하기 그지 없어서 집안에서 반대중이란다. 정확히는 그의 누이이자 엄마인 사람이. 어디에서 많이 듣던 얘기 같지 않냐며, 내 호적상 형은 아주 재미있다는 듯이 그 사실을 말해주었다. 그는 내게 반응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정윤호와 헤어진 후에도 이따금씩 그는 나를 그렇게 시험했다. 내가 조금의 반응이라도 보이면 바로 정윤호에게 제가 알아낸 그 서류를 보낼 사람인 걸 나는 알았기에, 반응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사실은 그 여자가 궁금하고, 그 여자가 원망스럽고, 그도 원망스러웠는데도.
버린 것은 나인데 말이다.
그래도, 차라리 결혼을 하고, 시간이 흐른 후에 보면 괜찮지 않을까 했는데. 이런식으로 느닷없이 보게 되는 그는 여전히 심장을 몸부림치게 만들어서. 반사적으로 심장께를 짚었다. 그는 어디 아프냐고 당황스럽게 물어봤다. 그래, 당신은 그런 사람이지. 매몰차게 자신을 버리고 간 사람에게도 괜찮냐고 물을 수 있는. 하나도 안 변했네. 아니, 변하긴 변했다. 이젠 눈을 보여주지 않아. 붙잡을 때 뚝뚝 흘린 눈물 마저도 숨기는 대신 고스란히 드러내던 당신은 이제 선글라스로 감정을 숨겨버렸어. 어른이 된 걸까, 당신은. 나는 여전히 당신을 버리고 가던 그 시간에 멈춰 있는데. 이렇게 그저 옆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호흡이 가쁠 만큼.
"-----!"
결혼할 그녀를 옆에 둔 당신이, 반대쪽 손으로 내 손을 꽉 잡아오는 것에 곧 숨이 막혀 죽을지도 모를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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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이라는 게 짧았어여...한동안 안쓰다 손풀겸 겸사겸사 했는데 시간 계산 잘못해서 낙퀄이 되어버린.
윤호 옆의 여자는 당연히 주다해고요, 호적상 형은 창민이에게 애증 비슷한 집착하고 있었다는 설정.
그냥 공항에서 이미 다른 연인이 있는 그 사람과 다시 한 번 손을 잡는 장면이 보고 싶었을 뿐인.
모티브가 된 사진은 111110 가을 동방신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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