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창민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제, 정말로 끝이었다. 시선이 느껴졌다. 일부러 그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이 끝을, 아쉬워하고 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졸업이었다, 그와의 관계도.




시즌 파이널


 (170205 #동방신기_전력_60분, 키워드 ‘졸업’)



심창민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제 앞에 놓여진 사진을 톡톡 건드렸다. 짙은 흑발의 미남이었다. 날카로운 눈매는 지배자다운 위압감을 발산하면서도, 촘촘하게 난 속눈썹과 흑백이 또렷한 말간 눈동자는 여심을 설레게 하는 애틋함이 있었다. 그리고 유려하게 뻗은 콧날. 그리고 상반신만 나와 있는 이 프로필 사진으로는 알 수 없는 부분이지만, 그는 동양인이란 게 전혀 패널티가 되지 않을 만큼의 우월한 신장과 비율을 갖고 있었다. 심창민은, 따로 기록된 그의 키와 몸무게를 읽지 않아도 그 부분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자신 앞에 놓인 프로필의 주인공, 정윤호, 예명 유노는 세계인이 사랑하는 전세계적 스타였으니까. 



정윤호의 스타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의 데뷔작 <세상의 끝>은 그야말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으니까. 재밌는 건, 그 드라마의 파일럿이 방영되기 직전까지 아무도 이 드라마에 성적을 기대하는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다. 방영 내내 이 드라마가 써내려간 수많은 기록과 시청률, 신드롬급의 인기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반전이었다. 애초에 <세상의 끝>을 제작한 방송국은 메이저 채널이기는 했지만 아동층 위주의 시장을 갖고 있었고, 가장 무난하고 상품화가 쉬운 내용만을 노리는 곳이었다. 주인공은 늘 금발벽안, 악역은 대부분 유색인종. 편견을 고착화하는 스테레오타입의 캐릭터들. 그에 대해 시민단체들은 꽤나 많은 항의를 보냈고, 이를 무마하고자 만들어진 것이 <세상의 끝>이었던 만큼 방송국 내부에서 이 드라마는 망작이 될거라는 예상이 대부분이었다. 한 번도 연기 경험이 없던 정윤호가 주인공으로 캐스팅 될 수 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정윤호는, 그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드라마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았다. 파일럿은 어마어마한 반응을 얻었고, 가장 좋은 시간대에 편성되어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드라마가 되었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이국적 느낌과는 다르게, <세상의 끝>은 미국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동양인 소년 – 정윤호 – 의 이야기였다. 가장 치열하게 고뇌하고, 방황하고, 또 성장해가는. 



미국인들에게 있어 모험과 성장은 가장 공감받기 쉬운 감성이었다. 그런가 하면 에피소드마다 녹여낸 피부색으로 겪는 차별, 그 나이대 청춘의 고뇌와 방황, 사회적 모순 등의 무거운 소재들은 사회적 공감대를 일으켰다. 정윤호는 무거운 소재를 단순히 탁상공론이 아닌, 사람들이 공감하게끔 하는 살아있는 ‘삶’으로 소화해냈다. 어느 평론가가 했던 말마따나, <세상의 끝>에서 정윤호가 보여주는 일상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모험’ 그 자체였다. 그 드라마로 정윤호는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배우가 되었고, 드라마가 세계로 수출되면서는 전세계가 사랑하는 배우가 되었다. 하이스쿨 1학년부터 3학년까지를 시즌마다 다뤘고, 시즌 3에서 윤호가 졸업하는 것을 끝으로 <세상의 끝>은 종영됐다. 모두가 윤호가 사회에 진출하는 모습도 보고 싶다고 성인편 제작을 희망해 왔으나, 정윤호는 그를 고사하고 영화 쪽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드라마와 마찬가지로, 성공했다. 방송국이 정윤호 대신 다른 동양인 배우를 기용해 만든 <세상의 끝: 성인편>이 혹평을 받으며 저조한 시청률로 막을 내리는 실패를 기록한 것과 다르게. 



아무튼, 그렇게나 유명한 정윤호를 심창민이 모를 리는 없었다. 심창민도 정윤호가 나오는 작품을 많이 봤었다. 정윤호가 찍은 유일한 드라마 <세상의 끝>은 물론, ‘가장 매력적인 남배우’로 정윤호를 꼽히게 만든 순애극 <I believe>, 21세기판 로마의 휴일이라는 평을 받은 <My little princess>, 삼각관계를 코믹하게 다루며 다소 묵직했던 정윤호의 이미지를 부드럽게 완화해준 <Tri-angle>까지. 하나같이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아니, 정윤호가 매력적으로 소화한건가. 자신 앞의 에이전트 역시 그 부분을 말하고 있었다. 



“…까지, 유노는 수많은 영화에서 열연해왔습니다. 드라마, 그것도 하이틴 청춘물이라면 아무래도 그 이미지가 생기기 마련이죠. 드라마가 히트하면 히트할수록, 그 캐릭터의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구요. 유노는 게다가 그 드라마가 첫 작품이었으니, 사실 이미지 변신이라는 게 굉장히 부담스러웠을 겁니다. 그러나 아주 성공적으로 이뤄졌어요.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이후 작품들이 모두 로맨스 한정이었죠.”



에이전트가 말을 고르려는 듯 잠깐 틈을 낸 사이에 치고 들어갔다. 에이전트는 그 뜻밖의 기습에 잠깐 놀랐는지 눈을 껌벅이다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네. 거기에는 사실 이유가 있었죠. 유노는 굉장히 욕심 많은 배우입니다. 아니, 금전적인 부분이 아니라, 일적인 부분에서요. 그는 꾸준히 연기 스펙트럼을 넓히고 싶어 했습니다. 사실 <세상의 끝> 종영 이후 처음 하고 싶다고 골라왔던 작품도 대단히 실험적인 내용이었죠. <세상의 끝>도 그게 예기치 못하게 히트해서 그랬지, 꽤 모험적인 내용이었지 않습니까….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맨스 위주로 작품을 고르게 된 건, 뭐, 결국은 <세상의 끝>이 너무 히트한 게 문제였죠.”



에이전트는 혀를 찼다. 그의 얼굴은 숨길 수 없는 안타까움이 그득했다. 심창민은 그를 이해했다. 아까, 에이전트의 말을 끊고 정윤호가 로맨스 영화만을 한 것을 지적할 때의 심창민도 그런 기분이었으니까. 그의 영화는 좋았다. 영화 속 그의 연기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러나 보면서 심창민은 갈증을 느꼈었다. 정윤호는, 그보다 더, 더 많은 스토리를 표현할 수 있는 배우였다. 그런데 왜. 



“혼자 움직이는게 아니게 되었으니까요. 투자자들이라던가, 광고주들이라던가. 그들은 유노가 일정한 이미지를 유지하기를 희망했어요. 지금 유노는 가장 잘 팔리는 이미지를 갖고 있으니까요. 대중적이고, 매력적이고, 음침하거나 사악해보이지 않지요. 그가 악역에 관심을 보인다는 말만 돌아도 나에게는 온갖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나는 그를 악역으로 만드는 대신, 내가 악역이 되는 것을 선택했죠. 그래요, 내가 그에게 로맨스 대본들만을 고르도록 시켰어요.”



에이전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심창민은 어깨를 으쓱였다. 고작 그걸 고백하기 위해, 그는 자신을 여기에 앉혀놓은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은 고해성사를 들어주는 신부님이 아니었다. 



“유노는 착한 사람이에요. 나란 에이전트를 해고하는 대신에, 그는 진짜로 원하는 대본들을 포기했으니까요. 내가 생각지 못했던 건, 그가 점점 이 생활에 지쳐간다는 거였어요. 일주일 전, 유노가 나에게 말했어요. 은퇴를 하고 싶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죠. 그는 아직 20대예요.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언제나 그랬듯 나는 그를 설득하려 했어요. 지금 하지 못하는 작품들은 어차피 네가 나이가 들면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는 싫다고 하더군요. 진짜로 하고 싶은 작품을 그렇게 뒤로 미루면서 찍는 작품들은, 결국 베스트가 될 수 없다고요. 그건 작품에게도 예의가 아니라고.”



에이전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심창민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 계속 말해보라는 듯 빤히 그를 쳐다보기만 했을 뿐. 에이전트 역시 반응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악역 고려만 해도 난리가 나는데, 은퇴 고려라니 그 다음날 내가 얼마나 시달렸을 지에 대해선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되겠죠. 아무튼,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빌어먹을- 죄송합니다, 투자자들은 앵무새처럼 말을 반복했죠. 은퇴는 안 된다, 하지만 실험적인 영화도 안 된다, 악역도 안 된다. 그러면 유노는 은퇴한다고 하면 또다시 은퇴는 안 된다. 하지만 실험적인 영화도 안 된다…. 오, 나는 5살짜리 학습 부진아가 된 느낌이었어요. 계속 같은 소리를 듣다보니 말입니다. 아무튼, 나는 성공했어요. 그 빌어먹을 앵무새들을 설득하고, 유노에게 은퇴를 막을 카드를 던졌죠.”



그게 바로, 그겁니다. 에이전트는 창민이 들고 있던 정윤호의 프로필 파일 뒤에 있던 두꺼운 서류봉투를 가리켰다. 창민은 봉투의 입구를 페이퍼나이프로 자르고 안에 있던 서류를 꺼내들었다. 눈으로 서류를 읽어 내려가던 창민의 눈에 당혹이 깃들었다. 



“저, 미스터.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만.”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미스터 심.”



에이전트는 상냥하고 단호하게 말했고, 창민은 다시 한 번 눈을 서류에 고정시켰다. 에이전트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심창민은 뭔가 잘못된게 맞다고 생각했다. 이 에이전트는, 갑자기 자신에게 찾아와서 정윤호의 배우생활에 대해 늘어놓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확실히 무언가를 잘못 알고 온 것이 분명했다. 



“이건 시놉시스잖습니까. 그것도 TV 쇼의.”


“정확히는 페이크 다큐 TV쇼죠. 동거를 테마로 하는.”


“그리고 저는 방송인이 아니고요.”



저는 식당을 하고 있는 셰프죠. 누군진 모르지만, 비서를 자르세요. 레스토랑 예약과 출연진 섭외를 착각해 당신의 시간을 낭비하게 한 것 같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일어서려는 창민을 에이전트는 가로막았다. 



“아니요, 당신은 방송을 해야 합니다. 이 쇼에 당신만큼 적합한 사람은 없으니까요.”



창민은 억지를 싫어했다. 차갑기는 했었지만 그래도 본인이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는 예의상의 미소가 남아있던 얼굴이 무표정하게 변했다. 그 얼굴을 마주한 에이전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야말로, 제대로 수완을 발휘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여기서 섭외가 실패한다면, 자신은 정말로 정윤호라는 최대고객을 잃을 수 있었다. 




*



에이전트가 투자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꺼낸 카드는 다름아닌 정윤호의 TV 귀환이었다. 방송사들은 <세상의 끝> 이후로 스크린에서만 활동하는 정윤호를 섭외하기 위해 그야말로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있었으니까. 투자자들도 그를 원했다. 매주 기사가 뜨는 파급력이나 화제성의 면에서 TV출연은 아주 긍정적인 부분이 많았으니까. 그렇게 투자자들에게 먹이를 물려주고, 정윤호를 설득하기 위해 에이전트는 아주 파격적인 설정을 만들었다. 정윤호를 출연시킬 쇼는, 사실 쇼라기보다 드라마에 가까웠다. 페이크 다큐 형식의 리얼리티, 무려 정윤호가 남자 애인과 동거한다는 설정의. 



처음 설정을 들었을 때 투자자들의 반응은 당연히 우려였다. 최근들어 대중적 인식이 많이 완화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동성애는 파격적인 소재 중 하나였으니까. 이때야말로 에이전트가 자신에게 있던 모든 역량을 쏟아 부어 혀를 놀린 때였다. <세상의 끝>으로 쌓아올린, 사회 문제에 있어 고민했던 청춘의 이미지와 영화들로 쌓아올린 로맨틱한 남자의 이미지 어느 쪽도 잃지 않으며 오히려 그 폭을 넓게 할 수 있다고. 물론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형식을 진지한 정극 영화가 아닌 TV쇼, 그것도 대놓고 ‘페이크’라고 써 붙여 놓은 쇼로 한 게 아니냐고. 정윤호의 이미지를 해치지 않을뿐더러, 이후 정윤호가 다소 파격적인 설정을 택하게 되더라도 지금의 이 실험적인 쇼가 많은 완화를 시켜줄 거라는 에이전트의 설득은 먹혀들었다. 물론 이것조차도 안 될 경우 정윤호가 정말로 은퇴할지도 모른다는 에이전트의 협박 섞인 호들갑도 한 몫 했을거고. 



“그런 정황은 궁금하지 않습니다. 저는 왜 하필 그 상대가 저여야 한다는 건지가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그 정윤호와 함께 TV에 나오고 싶은 배우들은 쌔고 쌨을 것이다. 자신은 일개 셰프일 따름이었고. 아까 읽어 본 시놉시스에 따르면, 딱히 쇼에서 요리라던가가 필요한 부분도 아니었다. 주요 내용은 부동의 인기를 자랑하는 ‘로맨스의 왕자’ 유노가 남자를 사랑한다면? 의 가정이었으니. 정윤호가 중요한 거지 상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왜 자신인가? 동양인, 그 중에서도 정윤호와 같은 한국 출신이라? 여전히 말이 안 됐다. 미국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이 자신 혼자인 것도 아닌데? 



“당신이 ‘미니’잖습니까.”



…아. 무표정으로 가장하고 있던 창민의 표정이 깨졌다. 설마,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샌디. 



“…산드라가, 말했습니까?”


“그 반응을 보니 내가 정확하게 맞췄군요. 아니, 그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인맥 중 ‘미니’와 비슷하게 들리는 이름은 다 조사했죠. 힘들었어요. 예명이 맥스라 하마터면 빠뜨릴 뻔도 했고요.”



에이전트는 뿌듯하게 말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창민은 정반대로, 찔러 본 것에 바로 답을 알려줘 버린데 대한 패배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러니까, 그 ‘미니’ 얘기는. 잘 알려진 이야기였다. 그 시기 청춘들이라면 모두 추억을 공감할 수 있는, 그야말로 히트작 <세상의 끝>은 앞서 말했듯 그 명성과 인기를 생각하면 말도 안될 정도로 초반 기대를 받지 못한 작품이었다. 당연히 작품을 담당한 작가 산드라도, 경력이 일천한 신인작가였다. 유노와 마찬가지로 작품이 흥행하며 그녀 역시 스타작가로 발돋움하게 되었지만. <세상의 끝>으로 시나리오상을 수상한 그녀가 시상식장에서 밝힌 소감은 꽤나 화제가 되었는데, 다름 아니라 <세상의 끝>에서 유노가 연기했던 배역은 실제 모델이 있었다는 내용 때문이었다. 그게 바로 미니였다. 다만, 산드라는 “네가 없었다면 ‘유노’는 탄생할 수 없었을거야. 너의 이야기를 쓸 수 있도록 해줘서 고마워, 내 사랑스러운 미니.”라는 소감 외에는 아무 힌트도 주지 않았다. 실존 모델에 대한 기사를 쓰고 싶었던 기자들이 수없이 찾아가 질문을 던졌음에도. 



<세상의 끝> 속 유노가 겪었던 불합리한 세상은, 상당수가 창민의 경험에 기초하고 있었다. 산드라는 창민이 그 불합리와 싸워가며 자신의 자리를 만드는 모습을 친구로 지켜봐왔다. 그녀는 창민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했다. 창민이는 그를 허락했다. 다만, 조건을 달아서. 적어도 자신보다는 행복해지게 해달라고. 그렇게, 불합리 속에서도 꿋꿋하고 명랑하게 그 모든 걸 극복하고 행복해지는 유노가 탄생했다. 



“당신이어야만 해요.”


“저는 원치 않습니다.”


“제발. 내가 ‘미니’를 생각해 냈을 때 유레카를 외친 걸 압니까? 간신히 기획을 밀어붙였는데, 막상 상대를 찾으려니 막막하기만 했다고요. 당신밖에는 없어요.”



연예인은 당연히 처음부터 선택지에 없었습니다. 계속 같은 업계에서 만나며 엮일 가능성이 크니까요. 모르는 사람? 나중에 어떤 식으로 말을 지어낼 수 있으니 제외. 그렇다고 아는 사람은 연예인과 같은 문제가 있지요. 끊임없이 엮일 수 있다는 것. 일부러 ‘페이크’라고 강조했지만, 대중은 그걸 진짜로 믿어버릴 수 있는 사람들 아닙니까. 인연이 있지만, 엮일 일은 없는 사람. 정말 까다로운 선택지죠. 그게 바로 ‘미니’였습니다. 정윤호의 인생을 바꿔준 배역의 실존 모델이자, 그 배역으로 엮인 일만 아니라면 둘은 서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이죠. 특별한 인연은 있으나 굳이 서로 볼 필요 없는 사이. 퍼펙트하잖아요? 



“유노의 쇼는 유노의 쇼고, 저는 TV 출연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셰프고, 제 일에 충실하고 싶어요.”



돌아가시죠, 축객령에도 에이전트는 끈질겼다. 정윤호라는 배우의 가능성을 생각해주세요. 당신에게는 해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출연료는 물론이고, PPL쪽도 신경써드리죠. 계약 조건은 최상으로 쳐드릴테니 – 도무지 멈출 줄 모르는 설득에 창민은 결국 예의가 아닌 줄을 알면서도 일방적으로 대화를 종료하고 주방으로 도피했다. 실제로 에이전트 때문에 가게 오픈을 앞두고 꽤 오랜 시간이 소모되어 있었고, 일이 밀려 있었기에 그것은 적절한 핑계가 되었다. 다만 창민이 생각하지 못한 부분은, 이 에이전트는 정말로 끈질겼다는 거였다. 그는 손님으로서 풀코스 정찬을 주문해가며 끝까지 레스토랑에서 자리를 빼지 않았다. 영업이 종료되고 창민이 홀로 나올때까지. 



“이제 얘기를 계속하실까요?”



창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



치열한 다툼 끝에 승리한 것은 에이전트였다. 유능하긴 한가본지, 창민의 레스토랑에 투자한 오너를 포함해 정말 창민의 주변 모든 인맥을 설득하는 데는 이겨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야 할만큼 이 쇼가 소중한거겠지. 정확히는, 이 쇼를 통해 은퇴를 막을 수 있는 배우 유노가. 그리고 창민은 그 에이전트를 이해했다. 누가 이 사람을 영영 화면에서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실제로 본 유노는, 영상으로 보던 그것보다 더 눈부시게 빛나고, 반짝거려서. 



창민은 눈물이 날 것 같다고 느꼈다. 처음 <세상의 끝>에서 유노를 봤을 때처럼. 유노는, 창민이 되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창민이 더 행복해진 모습이었다. 그래서 유노는 고마운 존재였고, 동시에 질투나는 존재였다. 그 유노를 살아 숨 쉬게 해준 유노, 정윤호. 그는, 창민에게 있어서. 



아, 그 순간 창민은 알았다. 자신은, 에이전트가 아무리 설득해 와도 이 일을 받아들여서는 안 되었다. 살아있는 ‘유노’가, 웃으며 저에게 악수를 청해 올 때 심장이 그렇게 알려주었다. 그 어느때보다 빠르고도 격한 박동으로. 너는, 이제 이 심장의 속도로 살게 될 거라고. 그리고 계약 기간이 끝나면 서서히 죽어가겠지. 심장을 빠르게 뛰게 할 존재는 이제 사라질 테니까. 동력을 잃은 심장은 서서히 느려지고, 멈춰버릴 것이다. 그 절망감 속에서도 심창민은 티를 내지 않았다. ‘노란 동양인’이라고 무시하는 시선 속에서 저의 무기가 되어 준, 특유의 가면같은 무표정은 이번에도 도움이 되었다. 



*



촬영은 넓은 정원을 가진 ‘신혼집’에서 이뤄졌다. 창민은 PPL 노출을 거부했고, 자신의 가게를 굳이 홍보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윤호 역시 굳이 쇼를 위해 자신의 사생활을 드러낼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결국 ‘신혼집’을 섭외하는 것으로 되었다. 창민은 그 집이 마음에 들었다. 드넓은 정원이 있어, 꽃도 나무도 많았다. 윤호 역시 그 집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그는 집에 혼자 둘 수가 없다며 큰 시베리안 허스키 한 마리를 데려왔는데, 촬영이 시작되기도 전에 정원에서 허스키와 프리즈비를 던지며 놀고 있었다. 창민은 창문 밖으로 턱을 괴고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디에 있어도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이 사회에 녹아들기 위해 발버둥 쳐야 했던 자신과 다르게.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개와 노는데 집중하는 줄 알았던 정윤호가, 자신에게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어쩐지 들킨 기분이 들어, 화들짝 놀라 커튼을 내려버렸다. 창민도 윤호도 아직 촬영 전이라 생각했지만, 사실 그 모든 것은 카메라에 찍히고 있었다. 



#



<세상의 끝> 자료 화면. 소년 ‘유노’가 웃고 있다. 

유노 위로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정윤호. 입을 연다. 

“그는 나의 뮤즈죠. 유노는, 그가 없으면 태어날 수 없었어요.”


화면 전환. <세상의 끝> 시나리오상 수상 소감. 

산드라의 ‘미니’에 대한 감사 인사. 

당시 ‘미니’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기사들 자료화면. 


화면전환. 레스토랑. 레스토랑 손님들 인터뷰. 

- 동양인이지만 맛의 세계가 믿을 수 없을만큼 풍부해요. 

- 분명 노력했을 거예요. 동양인에, 가정환경도 굉장히 어려웠다고 들었어요. 그런데도 저 젊은 나이에 헤드셰프잖아요. 


주방을 지휘하고 있는 창민. 주방 요리사들 인터뷰.

- 엄격하긴 하지만, 그만큼 실력있는 분이에요. 

- 꿈을 이룬 사람이죠. 멋있어요. 제 롤모델이에요. 


창민 얼굴 클로즈업. 화면 하단 프로필. 민에 밑줄. 

미니? 라는 자막 흘러가고. 창민 인터뷰. 

“글쎄요, 산드라가 제 얘기를 써준다고 한 것 같긴 한데. 아닌 것 같아요. 유노는 제가 보기에도 너무 멋있어서.”


화면 전환, 하단 자막 둘의 첫만남. 

애견인 허스키 태풍이와 놀고 있는 윤호, 

창밖으로 윤호를 동경하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창민. 


둘의 이야기가 시작한다는 문구. 

쇼의 제목 및 첫방송 날짜 흘러간다. 

종료. 




#



쇼는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쇼의 기획자, 작가, 그리고 이 모든 걸 조율하려 노력한 에이전트의 몸값은 크게 뛰었고 기자들은 또 한 번 만들어진 유노의 성공신화에 대해 수많은 기사를 써내려갔다. 



성공할 요소가 많기는 했다. 최고의 흥행카드인 정윤호도 그렇고, 한 세대가 모두 추억할 수 있는 세기의 히트작 <세상의 끝>에 대한 비화가 나오고, 가장 사랑받았던 캐릭터인 유노를 배우한 연기자와 그 롤모델이 자리를 함께 한다. 기사거리가 많은 만큼 방송 시작전부터 화제성이 풍부했다. 



그리고 방송이 시작되고 나서 그 화제성은 한층 올라갔는데, 우선 비주얼이 매우 훌륭했다. 유노야 말할 것도 없고, 창민 역시 연예계에 발을 디딘 적이 없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만큼 매력적인 외모를 하고 있었다. 창민은 본인이 동양인이라 겪었던 괴로운 경험 때문인지, 자기의 외모를 너무 낮게 평가하는 것 같았지만 사슴처럼 늘씬한 체구에 예쁘장한 얼굴은 충분히 먹혀들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호감을 가졌던 건 창민의 눈이었다. 크고 맑고, 어딘지 순진한 인상을 주는. 정윤호를 볼 때 그 눈은 한층 매력적이 되었다. 표정을 굳히고 있어도 묘하게 다정한 느낌이 드는. 



외모의 조합만이 아니라 두 사람의 케미도 상당히 훌륭했다. 제작진에서 잡은 테마는 사실 코믹에 가까웠다. 양쪽 다 서로에게 어떤 이상을 갖고 있었겠지만, 막상 만나서 같이 생활하니 서로가 자기가 생각했던 이미지가 아닌 것을 깨닫고, 마지막에는 이혼한다는 테마. 방송국에서 그런 테마를 잡은 건, 윤호와 창민이 굉장히 다르기 때문이었다. 다정하고 활발하며 카리스마 있는 성격의 윤호. 조용하고 얌전하며 말이 없는 창민. 직업적인 부분에도 공통점이 없고, 하다못해 좋아하는 음식취향마저도 다르니. 



하지만 정작 붙여놓으니 제작진이 생각했던 것과는 그림이 다른 방향으로 나왔다. 사람들은 유노-맥스의 조합에 열광했다. 확실히 둘은 붙여 놓으면 재미있었다. 다만 제작진이 생각했던 것처럼 정윤호가 심창민을 소심하고 답답하다고 생각하거나, 심창민이 정윤호의 눈치를 보는 상황은 없었다. 오히려 정윤호는 초반부터 심창민을 오냐오냐하며 챙기려 들었고, 뭘 해도 예쁘다고 꿀 떨어지는 눈으로 봐주었다. 그런가 하면 심창민의 반응은… 글쎄, 정윤호가 찍은 어떤 로맨스 영화의 여주인공도 심창민만큼 밀당을 자연스럽게 구사하진 못했을 것이다. 챙김을 받는가 하면, 그래서 고마워하고 동경하기도 하고. 제가 할 수 있는게 있으면 신나서 제가 정윤호를 챙기려 들기도 하고. 또 그걸 거절하고 혼자 하려 애쓰기도 하고, 그러다가 혼자 있으면 외롭다고 솔직하게 속내를 밝혀버리기도 하고. 



제작진의 생각과는 달라졌지만, 반응은 좋았다. 어차피 페이크인 걸 다 아는데다가, 둘 다 굳이 결혼이라는 테마에 집착해 끈끈한 스킨십을 시도하는 것도 아니었다. 초반 인터뷰에서는 “오히려 둘 다 남자니까 스킨십은 별로지?” 라고 선을 긋기도 했고. (물론 짙은 스킨십이 안나왔다 뿐이지 손잡고 허벅지를 터치하는 등의 스킨십은 한 회차에도 수십번이 나오는 바람에 팬들은 이를 캡쳐해서 [함부로 인터뷰하면 안되는 이유.jpg]라는 제목으로 공유하며 놀리기도 했다) 보는 사람 입장에서도 적절한 수위였다. 소녀팬들도 좋아했지만, 성인이나 남성들 입장에서도 뭐 하나 공통점이 없는 것 같은 둘이 공감대를 쌓는 과정 자체가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 얘네 연애 컨셉 까먹은 듯. 원래 결혼 컨셉 아니었냐?

- 근데 그래서 재밌지 않냐. 우리집 여동생은 썸타서 연애하는 거 같다고 난리났다만. 

- 쟤네 대화하는거 써먹기 유용해. 나도 직장에 성격 나랑 완전 반대인 사람 있는데, 보면서 좀 이해되더라. 좀 친해져서 이제 수다도 떰. 걔도 이 프로 보고 있더라?

ㄴ나도 비슷한 경험 있음. 지금 걔가 내 여친이야. 

ㄴㄴ커플 꺼져.



일주일에 한 편씩 12회로 기획되어 있었는데, 호응이 높아 연장방송 요구도 있었다. 에이전트는 당연히 신나서 이를 실행에 옮기려 했다. 녹화 기간이 있어 사장시킨 기획인데, 둘이 같이 한국에 다녀오는 내용으로 4회를 늘리는 건 어떻냐고. 윤호는 괜찮다고 했지만, 창민은 거절했다. 




*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더 이상 꿈을 꿨다간 깰 수 없을 것 같아서.




*




마지막 회차의 부제는 졸업이었다. 처음 기획안 대로면 마지막 회는 서로에게 서운한 걸 완전히 다 풀고, 이제는 ‘유노’와 ‘미니’로 엮인게 아닌 ‘윤호’와 ‘창민’으로 독립된 삶을 살아가자는 내용이 되는 거였다. 지금은 대중 반응을 고려하다보니 완전히 다른 흐름으로 흘러가서, 마지막 회 내용도 바뀌었지만. 좀 더 애틋한 작별로. 



다만 현장 분위기는 미묘했다. 찍어야 하는 그림과 다르게 정윤호가 지나치게 데면데면했던 까닭이었다. 오히려 방송 내내 쿨한 캐릭터를 보여줬던 창민이 서운해하고 감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미련을 가질까봐 그토록 끝내려고, 끊어내려고 했는데. 이미 미련은 있었나보다. 아니, 외면하고 있다 뿐이었지 실제로 자신은 쇼의 처음부터 반해 있지 않았던가. 



- 졸업해야지. 



애써 창민이는 웃었다. 시청자들이 우는 듯 웃는다고, 창민도 드라마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눈꼬리는 미소를 머금는데 눈동자에는 슬픔이 보이는 그 애틋하고도 오묘한 표정이 화면에 담겼다. 창민이 알았다면 그 화면은 내보내지 말아달라고 했을 것이다. 정말로, 졸업하고 싶었으니까. 회차의 제목처럼. 정윤호에 대한 마음을. 




“윤호형은 안 슬퍼요?”


“왜?”


“이제 끝이잖아요.”


“그런가? 그러고보니 우리 오늘 마지막회네.”




…그래야지. 그는 너무도 태연한데. 



*




“창민아.”



마지막 촬영이 끝나고, 돌아가는 자신의 등뒤에서 정윤호가, 자신을 불렀다. 


“왜요?”


“또 보자.”


“우리 이제 졸업했는데, 뭘 또 봐요.”




끝났잖아요, 우리 방송. 창민이는 웃었다. 윤호도 따라 웃었다. 창민이의 웃음과는, 조금 다른 웃음이었다. 




“응, 방송은 졸업했지. 그러니까 이건,”



웃음을 머금은 입술이 가까워졌다. 




“진짜 연애는, 이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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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면서 계속 이게 아닌데.....를 했다 왜냐면 너무도 이건 단편용이 아니라서...?

사실 심창민 졸업날 동정졸업하는 정윤호 / 생일이니까 오빠 빨리 제대했음 좋겠다고 사관학교 제대물로 장교 정윤호 

아니면 아예 리얼물로 심창민 졸업식날 귀뚫어도 된다고 허락해주는 정윤호

뭐 이런거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언제나 글쓰다보면 내가 생각한대로 안되는.....결국 이런 결과물이 나오고 말았......






오빠 생일이 내일이라 부랴부랴 쓰기 시작했는데 망했어ㅇ<-<는 마지막이 중요한건데 왜 늘 시작에 힘을 주다가 분량조절 실패하는걸까ㅇ<-<

정작 쓰고 싶었던 쇼 내용이라던가는 하나도 못썼.... 쇼에서 윤호 생일 맞아서 창민이가 요리해주는걸 쓰고 싶었는데!ㅠㅠㅠㅠ

언젠가 기회되면 쓰겠지....일단 생일에 맞춘다고 서둘렀단 핑곌 대더라도 이렇게 저퀄이어도 되는 것일까 오빠 내가 마니 미안해ㅠㅠㅠㅠㅠㅠㅠ

그래도 오빠 많이 사랑하고 생일축하해요♥ 고무신 거꾸로 안신고 기다리고 있으니 오빠 얼른 제대해♥ 보고싶어요ㅠㅠㅠㅠㅠ 







오빠가 많이 많이 웃기를





완댜님...!









완댜님!!!!!!!!22222222 (야광봉)(야광봉)